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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내여행/문화재

[충남 공주여행]역사를 한눈에 볼수 있고 명절엔 놀거리가 있는 충청남도 역사 박물관

 충청남도 역사 박물관

 

충청남도의 역사와 문화를 한눈에 볼수 있는 충청남도 역사 박물관에 다녀왔습니다.

이번여행은 충청남도 기호유학명재 윤선생을 찾아 떠나는 여행으로, 역사박물관 "기호유교문화", "기호유학" 의 흐름 명재윤선생의 일생과, 명재고택종손과의 이야기 전통과 예절등을 배우는 여행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중 첫번째로 찾아 간곳이 충청남도 역사박물관으로 충청남도에서 출연한(재)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에 속한 박물관으로 충청남도의 역사와 문화를 재 조명하고, 바로 세워 역사, 문화적 정체성을 확립하고 충남도민의 문화적 자긍심을 세우기 위한 목적으로 2006년 9월 28일에 개관하였다

1층은 윤증선생일가의 삶에 대해 전시되어 있고 2층 상설전시장에는 충남의 역사에 대해 기록되어 있다.

관람안내 오전:9시~오후6시 (입장시간은 관람시간 종료 30번분전까지 이며 관람료는 무료입니다.)

※ 매주 월요일은 휴관입니다.

 

 

 

아메미야 다다마사가 박물관 인근에 벚나무를 식재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그의 아들 아메미야 히로스케는 충청남도에 200여점의 유물을 기증하기도 하였다.

 

공주시에 마을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충청남도 역사박물관 주변 이에요..

 

역사박물관 1층 전시관에는 윤증선생의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월강록/月講綠

파평윤시 문중 서당인 종학당의 월별 고과 성적표이다. 1896년부터 1903년까지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경서를 읽고 평가한 결과가 기록되어 있다.

학생의 이름과 시험과목, 결과 사는 곳을 적었으며, 강장과 참강, 유사의 이름도 함께 기록하였다.

종학실부/宗學實簿

종학당에 소장되어 있는 서책과 기물의 수량, 소장 연대와 유래를 적은 일종의 전여기이다. 내제는 서책도수이며, '파윤종학당장'이라는 소장인이 찍혀있다.

노성가법/魯城家法

윤증이 문중에서 전해지는 규약과 대소사에 필요한 서식들을 총 망라하여 정리한 책이다. 팔송 윤황이 자손들에게 남긴 가훈과 계제자서,윤순거의 종약 종회의 완의와 통문 , 제례와 혼례, 상례의 순서를 기록한 홀기, 축문 서식등이 실려 있다.

노강서원학규/魯岡書院學規

노강서원 학규로 모두 21조목으로 되어 있다. 원생의 자격과 공부하는 순서, 평가 및 등급 산정 방법 등이 기록되어 있다. 8첩으로 된 문서는 명재 윤증의 친필로 노강서원 창건 1675년(숙종 1)당시에 써진 것으로 추정된다.

교산묘문

윤선거의 묘비를 터본하여 첩으로 만든 것이다. 1670년에 세워진 윤선거 묘비는 종형인 윤원거가 짓고 막내형인 윤문거가 썼다.

윤선거는 1699년(현종10)4월 충청도 나산현(현 논산시 노성면)에서 세상을 떠났고, 경기도 교화현(현 경기도 파주시 교하읍)법흥마을 월룡산

서쪽 기슭에 장사지냈다.

노서유고[魯西遺稿]

윤서거의 시문집으로 아들인 윤증 尹拯이 직접 정리, 편찬하였으며, 1712년에 노강서원[魯岡書院]에서 간행하였다. 문집에는 유계, 송시열, 이유태 등 평소 윤선거와 교분이 두터웠던 교우들과 주고받은 시와 편지, 스승인 김집 등에 대한 만시 漫詩와 38편의 상소가 연도별로 수록되어 있다.

가례원류[家禮源流]

유계와 윤선거가[가례]에 관한 여러 글을 분류하여 정리한 책이다.

현재 유계본[가례원류]와 윤선거본[가례원류]2종이 전한다. 이[가계원류]는 유계의 수필본[가례원류]에 윤선거가 정리한 것을 아들 윤증과 족현손 윤광소가

직접 증보한 필사 초고본이다.

 

성혼 신도비명탁본첩[成渾 神道碑銘拓本帖]

우계 성혼의 신도비명을 탁본하여 첩으로 만든 것이다. 성혼의 신도비는 경기도 파주시 파주읍 향양리에 있는데 비문은 청음 김상헌(1570-1652)이 짓고, 글씨는

 신독재 김집(1574-1656)이 썼다.

 

 

명재윤선생이 살아 생전에 쓰셨다는 부채와 신발 지팡이 빗자루에요

 

혼천의 渾天儀

천체의 운행과 위치를 측정하던 기구이다. 삼중으로 되어 있으며, 육합의 삼진의 사유의의 순서로 구성되어 있다.

십자형 받침과 4개의 원기둥, 남북극의 축은 나무로 만들어 졌으며, 각각의 환은 대나무로 만들어 졌다.

 

파평윤씨 노종파[魯宗派]

파평윤씨는 고려 이래의 명문거족으로, 여진토벌과 동북 9성을 축조한 윤관을 비롯하여 수많은 인물을 배출하였다.

파평윤씨 중에서도 노종魯宗 오방파 五房派는 충청도 노성현(니산현)에 세거했던 가계이다.

노종 5방파가 노성에 자리를 잡게 된 것은 윤돈 尹暾(1519-1577)으로 부터이다. 윤돈은 윤선지 尹先智(1501-1568)와 평산 신씨 사이에서 3형제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윤돈의 형 윤희와 아우 윤욱은 경기도 파주에서 살았고, 윤돈 만이 통정대부 첨정 류연의 2녀 문화 류씨와 결혼하여 바로 처향인 노성 근방의 니산현 득윤면 당후촌(현 광석면 득윤리)으로 1538년경 이주하면서 노성지역과 처음 인연을 맺는다.

윤돈은 59세를 일기로 1577년(선조10)에 죽었고, 그의 아들 윤창세(1543-1593)는 광석면 득윤리에서 노성면 병사리 비봉산 자락으로 터전을 다시 옮겼다. 바로 이윤돈-윤창세의 가계를 이어 노종 5방파가 파생되는데, 윤창세의 아들들인 설봉공[수遂], 문정공 [황煌], 충헌공 [전栓],서윤공[흡翕],전부공[희熺]의 5파가 그것이다.

이들 5방파의 형성기인 16-17세기는 호란과 청조의 압력으로 나라의 근본이 흔들리는 혼란스러운 시기였느데, 노종 5방파 인물들은 척화 운동을 주도하는 등 우국충절의 명문가문으로써 이름을 날렸다. 이후 파평윤문은 노성지방 뿐만 아니라 호서지역의 가장 대표적인 사족가문으로 부상하였다.

 

일월연日月硯은 17세기 후반의 것으로 명재 윤증이 사용하던 사각모양의 벼루로 오석 烏石으로 만들었다.

앞면은 기암괴석으로 둘러쌓인 연당 硯堂[먹을 가는 곳]과 연지 硯池[먹물이 모이는 곳]위쪽으로 소나무와 사슴, 달 아래에 물을 뜨는 선인 仙人등이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는 장생문연長生文硯이며, 뒷면은 해와 달이 겹쳐진 형태의 일월연 日月硯이다.

앞뒷면 모두 벼루로 사용할 수 있으며, 목제 연갑 연硯匣에 보관되어 있다.

2층 상설전시실에는 역사관입니다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

조선 말기, 1861(철종 12) 김정호(金) 만든 우리나라 지도.

1834(순조 34) 김정호 자신 제작한청구선표도 27 수정, 증보한 으로, 27년간 전국 직접 답사하고 실측하여 만들었다.

 

지금의 주민등록증 처럼 예전엔 호패를 들고 다녔다고 합니다.

 

 


 

 

충청남도역사박물관에서는 주로 조선시대부터 근현대 시기까지의 역사자료와 생활민속품을 수집하여 전시하고 있습니다.
흔히 박물관은 고고학적 발굴성과를 전시하는 장소로 인식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충청남도역사박물관에서는 조선시대부터 근현대 시기를 중심으로 전시함으로써 고대와 백제 중심의 기존 박물관 들과의 차별성과 상호 보완 효과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관찰사의 지방 순시

조선시대 관리의 근무성적을 평가하는 것을 포폄(褒貶)이라 하였다.

그리고 그 성적에 따라 관리의 승진과 강등 때로는 파직이 결정되었는데, 이를 출척(黜陟)이라 하였다. 특히 수령의 업무는 '칠사(七事)'라는 이름으로

[경국대전]에 실려 있었고, 관찰사는 그 각 항목에 대하여 선(善)· 최(最)·악(惡)·전(殿)으로 구분하여 평정하였다.

관찰사는 매년 6월 15일과 12월 15일에 근무성적을 작성하여 임금에게 보고 하였고, 임금이 열람한 후 이조(吏曹)에 보내면 이조의 고공사(考功司)에서 이를 합하여 보관하다가 고과성적에 반영하였다. 포폄의 성적은 상·중·하의 등급으로 구분되는데, 특히 하에 해당되는 수령은 즉시 파직되었을 뿐만 아니라, 2년동안 벼슬에 나갈 수 없었다. 순력은 수많은 수행원과 함께 행해졌는데, 전시된 축소모형은 그 일부를 보여주는 자료이며, 포폄목(褒貶目)은 포폄의 결과를 공개한 문서이다.

Gwanchalsas inspected and classified the performance of county magistrates into 3 levels, and reported the results to the central government twice a year. County magistrates who got the lowest rank were immediately dismissed and couldn't take any official positions for two years. The performance record is called Popyeommok.

 

 

충청도의 유래

'충청'이라는 이름은 고려 후기에 처음 등장하여 양광충청도, 양광도, 충청도 등으로 바뀌었는데, 대체로 조선 초기까지는 양주와 광주 고을의 머리글자를 따서

양광도라 하였다. 그러나 수도를 한양으로 옮기면서 양주와 광주는 경기로 편입되었고, 충주와 청주를 취하여 충청도가 되었다. 때로는 충·효·열처럼 강상(綱常)과 관련된 중대 범죄가 발생하면, 고을의 등급을 낮추고 목사가 파견되었던 공주나 홍주의 머리글자를 따서 충공도· 충홍도· 청공도· 청홍도 등으로 불리기도 하였다.조선후기에는 호서(湖西)라는 지명도 흔히 사용 되었다.

백동화로

화로는 숯불을 담아 실내를 덥히는 도구로 무쇠, 곱돌, 놋쇠 등으로 만든다.

전시된 화로는 조선후기에 백동으로 제작된 것으로 호사품에 속하며, 표면은 아(亞)·복(福)·희(囍)등의 글자와 대나무, 덩굴무늬 등으로 장식되어 있다.

고종 때 명성황후 민씨의 친정 조카인 아신시 외암마을 ☜(외암마을 민속촌) 의 퇴호 이정렬 가문의 소장 유물이다.

 

은잔

참판(參判)을 지낸 퇴호(退湖) 이정열(李貞烈)이 고종으로부터 하사받은 잔과 잔받침이다. 잔 하나에는 오얏꽃[李花]문양이 새겨져 있고, 그 받침의 전체 모양은 오얏꽃 형태이다. 오얏꽃 문양은 대한제국의 황실을 상징하는 문장(紋章)이었다.

 

 

 

성삼문 신주의 여정/成三問 神主의 旅程

성삼문은 1456년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가 참화를 당하면서 그의 동생과 아들 등이 모두 죽임을 당하여 혈손이 끊어졌다. 성삼문의 부인 김씨는 관비로 끌려가서도 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거르지 않았다고 한다. 김씨가 죽은 후에는 외손 박호(1466-1536)의 가계에서 제사를 받들다가 임진왜란 때 신주를 땅에 묻었다고 한다. 1672년 인왕산의 바위가 무너지면서 묻혀있던 성삼문의 신주가 발견되었고, 이 신주는 우암 송시열 등의 의견에 따라 홍주 노은서원에 봉안되었다.

1871년 노은서원이 훼철됨에 따라 성삼문의 신주를 모실 곳이 없게 되자 외손인 박진하가 노성 당호재로 옮겨 봉안하였다. 1903년에 칙명에 의해, 성삼문의 봉사손이 결정되면서 창녕성씨 집성촌인 연기군 금남면 달전리 사우(현 문절사)로 옮겨졌다. 1950년 한국전쟁 당시 신주의 훼손을 염려하여 단지에 넣어 땅 속에 묻었다고 전해진다.

 

 

연시연(延詩宴)

시호(試號)란 돌아가신 임금이난 공이 큰 신하에게 내리는 청호를 말한다. 원래 후손들이 임금에게 청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때로는 임금이 직접 내릴 수도 있다. 송준길은 시호를 청하지 말하는 유언을 남겼으나, 숙종이1681년 특명으로 문정이라는 시호를 내린 경우이다.

임금이 시호를 내린 경우에는 곧바로 시호를 하사하는 의식이 치러지는데, 송준길의 경우에는 집안의 변고로 인하여 1686년에 연시가 거행되었다. 후손들은 고을의 경계에 나가 선시관을 영접하고, 현감은 5리 밖에서 맞이하여 객사에 모셨다. 다시 본가까지 행렬이 이어지는 가운데, 이근 수령들이 집사관이 되어 사당에 시호를 봉안하는 의식을 거행하고 묘소에서 분황제를 올린다.

연시연 상차림 재료는 보통 나라에서 하사한다.

 

 

공주 상세동 산신도/충남유형문화재 제199호

1896년 공주 마곡사 심검당에서 그려진 산신도, 5명의 비구승들이 그렸으며, 공주 상세동 태화산 산신각으로 이안 되었다.

 

 

 

 

 

가학家學의 계승繼承, 우계 성혼과 팔송 윤황

한국 유학사에 있어 기호학파와 영남학파는 양대 산맥이다. 이 가운데 기호학파는 율곡학파가 그 중심축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기호유학의 흐름에서 간과할 수 없는 또 하나의 흐름은 우계牛溪 성혼成渾(1535-1598)으로부터 시작된 우계학파牛계溪學派이다.

우계학파는 조광조의 문인인 청송聽松, 성수침成守琛(1493-1564)과 성수종成守琮(1495-1533)으로부터 시작되어 성혼으로 이어지는데 성혼의 부친이 성수침이고 숙부가 성수종이다. 성혼의 문인으로는 윤황, 황신, 이항복, 김상용, 이정구, 신흠, 이귀, 정엽, 조헌, 안반준, 김덕령등이 있다. 특히 팔송八松 윤황尹惶(1571-1639)은 성혼의 막내딸과 혼인하여 사위이자 제자로서 우계학을 계승한다. 이후 우계학은 파평윤문으로 계승되어 가학적인 전통을 형성하게 된다. 우선 윤황-윤선거-윤증, 나량좌로 학통이 이어지며, 윤증의 문하에 박태보, 한영기, 정제두, 권이진 등이 있어 조선후기에는 '소론파少論派라는 정파적 성격을 갖게 된다.

 

태극기에는 그날의 흔적이 생생히 남아 있는 모습을 볼수 있었다.

 

조선위원화초석산수매죽일월연

朝鮮渭原花草石山水梅竹日月硯

16세기로 추정되는 중종中宗이 김구에게 하사하였다고 전해지는 벼루이다. 재질은 평안북도 위원군 압록강 수중에서 채집된 위원화초석이다.

벼루의 중앙에는 초승달 모양의 연지硯地, 해 모양의 연당硯堂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주변에는 매죽문梅竹紋이 시문되어 있다.

벼루의 상단에는 새 소식을 전해주는 기러기,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초승달이 있고 산악문山嶽紋을 넣어서 산악숭배신앙을 표현하였다.

하단에는 인간세계를 보여주고 있는데 좌측에는 한가로이 낚시하고 태공太公앞에 오리가 물고기를 부리에 물고 자맥질하고 있다.

중앙에는 두루미 한 쌍은 춤을 추고 있고, 우측에는 토끼가 거북이를 기다리고 있다.

 

 

 

 

조선박람회/朝鮮博覽會

19세기 말은 박람회의 전성기였다. 이러한 박람회 열풍은 조선에서도 예외가 아니어서 1906년 일한상품박람회를 시작으로 1915년 조선물산공진회, 1929년 조선박람회를 비롯해 매년 박람회가 개최될정도였다. 조선박람회는 1929년에는 조선총독부에서 소위 시정 20주년을 기념하여 개최한 것이다. 공업 농업과 수산업 등 각종 산업 분야의 발전상을 중심적으로 전시함으로써 근대 기계문명의 성과를 선보였다.

 

아메미야 히로스케 기증유물

천동거울, 천동수저, 복숭아 모양 잔, 탄화미,휴대용벼루

 

 

 

 

명절에는 충청남도 역사박물관에는 온가족이 다함께 요런 분이기로 가족들과 즐기실수 있습니다.

형제지간에 활을 쏘실수도 있구요, 며느리들끼리는 원반던지기도 가능합니다.

가까운 거리에 계시는 분이나, 여행길에 스쳐 지나가시는 분들 계시면 가족들과 오붓한 시간도 즐기며, 역사를 배워 보심은 어떨까요?

이것은 저희 가족이 작년명절에 즐겨본 사진이랍니다.

충남역사박물과 관람무료, 한눈에 역사를 볼수 있고 체험이 있어 이래서 좋아요~~

국고개 문화거리

이 거리는 고려시대 이복이라는 효자가 어머니 봉양을 위하여 국을 얻어 품에 안고 넘다가 국을 쏟아서 국고개라 한다. 이복은 병석에 있는 어머니를 위하여 겨울에 금강 물의 얼음을 깨고 잉어를 잡아 모친을 치유하였다는 전설이 전한다.

그리고, 공주시 옥룡동 부근에 '국을 엎질렀다'는 뜻의 '갱경(羹境)골' 이라는 지명이 있는데, 갱경골은 이복이 어머니에게 먹일 국을 얻어 귀가하던 중 서두르다 넘어져 궁를 엎지른 곳이란 유래에서 붙여졌다고 한다.

구고개는 박물관사 거리에서 옥룡동사거리 방면의 나지막한 고개로 고개의 양쪽으로 충청남도 역사박물관, 공주중동성당 등 근현대 문화유산이 위치하고 있다.

국고개 문화거리는 2009년 공주 구도심 옥룡동사거리에서 충남역사박물관, 구 읍사무소에 이르는 거리를 효자 이복의 역사적 배경과 근현대 문화유산(충남역사박물관, 공주중동성당, 구 공주읍사무소)등 주변 역사문화자원을 활용하여 공주시 구도심의 활성화를 위한 도시재생사업으로 조성하였다.

국고개 문화거리에는 조선시대로 추정되는 국고개 우물있다.

소재지 충남공주시 중동284-1 (충남역사박물관 주차장)

2009년 공주시에서 추진한 '국고개 문화거리조성' 사업을 진행하던 중 발견된 우물이다.

1970년대 국립공주박물관 건립 당시 지하 부분을 메우지 않고, 콘크리트로 덮은 관계로 원형이 거의 손상되지 않았다. 축조 연대는 확인할 수 없으나 전통우물의 축조 방식인 '허튼층쌓기'로 조성된 것으로 보아 최소 100년 이전에 조성된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우물터는 일제강점기 아메미야 다다마사가 얼음공장을 운영하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또한 박물관 인근에 벚나무를 식재한 인물이기도 하며, 그의 아들 아메미야 히로스케는 충청남도에 200여점의 유물을 기증하기도 하였다.

우물 깊이는 2.97m이며, 지름은 약 1.2m이다. 발견 당시에도 물이 용출되고 있었다. 이에 공주시와 협의를 거쳐 2010년 난간과 지붕 등 지상부분을 복원한 것이다.

역사가 깊은 곳 충청남도 역사 박물관에 다녀왔습니다.

가족들 얼굴도 볼수 있는 여행이어서 더욱이 의미 있던 곳이었네요..

이곳은 숲향기가 굉장히 좋습니다, 명절날도 이용해 보세요 ^^

 한주를 마무리 하는 금요일 남은 오후 시간도 힘내시구요, 즐거운 주말 맞이하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