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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내여행/문화재

[충남여행] 추사 김정희선생 고택과 백송[秋史 金正喜 先生 故宅과 白松]

페이스북에서 놀다가 우연히 산소 벌초하러가는 날짜와 맞게 추사 김정희선생에 관한 전 문화재청장님의 강의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남편을 졸라서 시댁패밀리와 고택을 돌아보는 기회가 왔네요, 고택도 보고 김정희선생님묘와 백송에 대한 정보를 알아왔습니다.
추사고택은 저희 둘째 서방님이 전통혼례를 했던 곳인데요, 15년만에 다시 와보는 거라 감회가 새롭습니다. 서방님이 같이 동행을 해주셔서 낙엽이 우수수 떨어진 고택 주위를 바스락 소리 내며 걸어보았네요...
10월13일(토) 논산 돈암서원에서 박범신(소설가)님의"왜 인문학을 말하는 가?" 특강을하신데요 꼭 참석해보세요~^^
충남역사문화연구원 http://www.cihc.or.kr



밖같 솟을 대문을 들어서면 사랑채가있고, "ㄱ"자 형태의 집입니다.
이곳에는 김정희 선생님의 글이 전시되어 있어요..

페이스북에서 놀다가 얻은 정보..2012년9월 15일



달리는 차안에서 배추심는 아주머니 들을 담아 보았어요..
1년농사 힘들게 지었는데, 태풍이가 원망스럽습니다.
자연재해니 어쩔수 없다지만 많은 분들의 슬픔을 무엇으로 헤아릴수 있을까요~~

충청남도 지정 유형문화재 제 43호

추사고택 추사의 증조부이며, 영조대왕의 부마이신 월성위(月城尉) 김한신(金漢藎)께서 1700년대 중반에 건립한 53칸 규모의 양반 대갓집으로, 추사선생이 태어나서 성장한 곳이며, 주변에는 추사선생 묘, 월성위 · 화순옹주 묘와 정려문, 백송, 추사선생이 수도하던 화암사 등 추사 선생과 관련된 문화유적이 있다.

추사고택은 304,47㎡으로 안채와 사랑채, 그리고 문간채, 사당채가 있고, 안채는 6칸의 대청과 2칸의 안방과 건너방이 있고, 안방 및 건너방의 부엌과 안대문, 협문, 광 등을 갖춘 'ㅁ'자형의 집이다.
안방과 건너방 밖에는 각각 툇마루가 있고, 부엌 천정은 다락으로 되어 있으며, 안방과 건너방 사이에 있는 대청은 6칸으로 그리 흔치 않은 규모이다. 이러한'ㅁ'자형 가옥은 중부지방과 영남 지방에 분포되어 있는 이른바 '대갓집'형이다.
사랑채는 바깥 솟을 대문을 들어선 마당에 자리잡은 'ㄱ'자형 집이다. 원래 사랑채와 안채는 엄격히 구분되어야 하는 것이 조선시대의 가택관념이었는데, 이는 유교적 윤리관념에 근거한 것이다. 이 사랑채는 남쪽에 한칸, 동쪽에 두칸의 온돌방이 있고, 나머지는 모두 대청과 마루로 되어 있다. 이와 같이 마루공간이 큰 것은 주인공의 사회적 활동이나 예술적 활동을 하는데 쓰였다고 한다.
추사고택은 하누리 시동생이 이곳에 전통혼례를 하고 15년이 흘러 다시와서 그런지 감회가 새로운 곳입니다. 그때는 이렇게 기록할 생각도 없고 그냥 일기쓰는 정도의 기록만 남겼는데요, 정말 새로운 마음이 들어가네요~~

사랑채 댓돌 앞에 세워진 돌기둥은 해시계 받침 용도로 쓰였으며, 석년(石年)이라는 글씨는 추사선생의 아들인 상우(商佑)가 추사체로 쓴 것을 각자(刻字)한 것이다.


추사 김정희선생이 쓴 필체가 액자에 담겨 사랑채 마루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가을날의 추사고택풍경


사랑채 바깥 소슬대문을 들어선 마당에 자리잡은 "ㄱ"자형의 집이다. 원래 사랑채와 안채는 엄격히 구분되어야 하는 것이 조선시대의 가택 관념이었는데 그것은 유교적 윤리 관념에 근거한 것이었다. 이 사랑채는 매우 크지만 남쪽에 한 칸의 온돌방, 동쪽에 두칸의 온돌방이 있고 나머지는 모두 대청의 툇마루이다.
이렇게 큰 마루공간이 있는 것은 주인공의 사회적 활동이나 예술적 활동을 하는데 요긴한 공간이었을 것이다.

THE SARANGCHAE

The Sarang-chae is shaped with a half square of "ㄱ" and is located in the garden which comes directly through a small wooden gate. It was the intrinsic conception of building in the chosun Dynasty to strictly discriminate the main building from Sarangchae (a drawing house built separately from the main building in the same premise and this building was for guests), and this conception was based on the ethical idea of confusianism.

세한도(歲寒圖, 국보 제180호)

세한도는 1844년 완당나이 59세때, 제주도에서 귀양살이 하는 동안에 제자인 우선 이상적(藕船 李尙適)이 정성을 다해 청나라 연경에서 구해온 책을 보내주는 등 변함없이 사제의 의를 지켜준 것에 대한 고마움을 세한송에 비유하여 그려준 그림으로, 완당 생애 최고의 명작이다.(개인소장)
이 그림은 추산선생이 제주도 대정에서 8년여의 유배생활을 하고 있을 무렵 자신의 심의를 그대로 형상화시킨 격조 높은 뛰어난 작품이다. 경울의 텅 빈 공간안에 서 있는 노송 몇 그루는 바로 선생 자신을 비유한 것이기도 하다.
원래 역관 이상적이 지난날 친하게 지내던 정의를 잊지 않고 귀중한 책들을 유배 중인 선생께 보내주는데 대한 보담으로 『松栢』은 「추운 겨울이 되어야 그 가치가 드러난다」는 뜻을 실어 그려준 것이다.
국보 제180호로 지정 되었다.

SE HAN DO

This painting was drawn by Chusa on Jeju lsland during his 8 years of exilc. It was painted for his dear friend, Translator Lee Sang-jeok, in thanks for the precious books he sent him.
This sophisticated piece of work is considered a great reflection of his mind. Chusa himself said the piece represents that "pine trees reveal their true value in cold winter." Perhaps he was comparing himself to the trees standing in the barrenness of winter.
It has been designated as National Treasure No. 180.

사랑채 댓돌 앞에 세워진 이 돌기둥은 해시계 받침 용도로 쓰였으며, 석년(石年)이라는 글씨는 추사선생의 아들인 상우(商佑)가 추사체로 쓴 것을 각자 (刻字)한 것이다.

각 기둥에는 김정희선생님의 서체로 보이는 글들이 짧막하게 기록되어 있으며, 그중 마음에 드는 걸로 몇개 담아왔어요~~

안채 여섯칸 대청과 두칸의 안방, 두칸의 건너방, 그리고 안방부엌, 안대문, 협문, 광등을 갖춘 "ㅁ"자형 집이다. 안방과 건넌방 밖에는 각각 툇마루가 있고 부엌천정은 다락이다. 대청 대들보에는 추사선생의 필적으로 짐작되는 글씨가 붙어 있었다. 육간대청은 그리 흔하지 않은 큰 마루이며, 이런한 규모가 큰 "ㅁ"자형 가옥은 주로 중부지방과 영남지방에 분포되어 있는 이른바 대갓집이다.

THE MAIN BUILDING

The main building with a square shape includes a hall with a dim-ension of 6 kan(a kan is equivalent to 5.9514 sq.ft), a living room with a dimension of 2 Kan.an opposite room of the living room with a dime-nsion of 2 kan, a kitchen attace-hed to living room, another kitc-hen a ttached to the opposite room, a gate to and from the main buil-ding, a side gate and a barn. In the exterior of the living room and its opposite room, a calligr-aphy seemingly written by chu sa is pasted on each side of the beam which runs between the living room and its opposite room.

 

 솥이 있는 쪽 좌측으로는 자연경치를 볼수 있게 설계되어 있어 감나무에 감이 익어 가는 모습을 볼수 있다.

 가을의 정취를 고스란히 느끼게 해주는 감나무에서는 감이 익어 가고 있네요..

  

안채 뒷쪽 감나무를 따라 올라오면 추사 김정희영정이 모셔져 있습니다.


 

아이들이 방명록에 다녀간 흔적을 남기는 모습도 볼수 있었는데요, 이것도 후세에 남겨질 보물이 아닐까요~
장난친 사람도 있네요 현대회장이 다녀갔다고 기록하면 후세에 이것도 역추적 하려나요 ㅎㅎㅎ
가족들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며 웃어 보았습니다.

 

액자유리에 반사되서 제모습만 나오고 김정희 선생님의 모습이 안보여서 제가 합성좀 했습니다.

추사 김정희 선생은 1786년 6월 3일 충남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에서 영조의 부마이신 월성위 김한신의 증손이며, 이조판서 김노경(金魯敬)의 아들로 태어나 백부 김노영에게 입양되었다.

선생은 조선왕조 후기의 실학자이며 대표적인 서예가로, 벼슬은 병조참판과 성균관 대사성에 이르렀으며, 당시의 당쟁에 휩쓸려 제주도와 함경도 북청에서 10여년간 유배생활을 지내다, 말년에 생부 노경(魯敬)의 묘소가 있는 경기도 과천에서 71세를 일기로 1856년 10월 10일(철종7년)에 작고하셨다. 선생은 단순한 예술가에 그치지 않고, 시대사조의 구문화 체계를 탈피하여 신지식의 기수로서, 새로운 학문과 사상을 받아 들여 신문화 전개를 가능하게 한 실학자인 동시에 선각자(先覺者)이기도 하다.
선생은 북학파의 거벽(巨擘)으로서, 청조의 고증학풍(考證學風)을 도입하여 학문으로는 경학(經學), 금석학(金石學), 문자학(文字學). 사학(史學), 지리학(地理學), 천문학(天文學)에 이르기까지 박통(博通)하였고, 북한산 기슭의 비석이 신라 진흥왕의 순수비(巡狩碑)임을 고증하기도 하였다.

비유: 진흥왕 순수비

진흥왕 순수비에서


다윗과 압살롬: 다윗의 부성애에 담긴 하나님의 사랑

압살롬이 살았을 때에 자기를 위하여 한 비석을 가져 세웠으니 이는 저가 자기 이름을 전할 아들이 없음을 한탄함이라 그러므로 자기 이름으로 그 비석을 이름하였으며 그 비석이 왕의 골짜기에 있고 이제까지 압살롬의 기념비라 일컫더라
사무엘하 18:18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며 가로되 만일 우리가 조상 때에 있었더면 우리는 저희가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데 참예하지 아니하였으리라 하니 그러면 너희가 선지자를 죽인 자의 자손 됨을 스스로 증거함이로다
마태복음 23:27‭-‬31

저서로는 완당집(阮堂集), 예당금석과 안록(禮堂金石過眼錄), 실사구시설(實事求是說), 완당척독(玩堂尺牘), 담연재시고(覃연齋詩藁)등이 있다. 이와 같이 넓고 깊은 학문과 천부의 재질을 바탕으로 한 추사의 예술은 시(詩)·서(書)·화(畵)·전각(篆刻)등 에도 뛰어났으며, 서도(書道)는 추사체라는 독자일문(獨自一門)을 열어 서예사상 지고의 경지를 이룩하였다. 작품으로는 「묵란도(墨蘭圖)」와 국보로 지정된 「세한도(歲寒圖)」등이 있다. (옮겨담은 글입니다.)
하누리는 이곳을 릿지로 올랐다가 남편한태 혼구녕 난곳이에요 ㅎㅎ


영정모습을 보고 아래로 내려가면 석류나무와 감나무 모과나무가 있습니다.
이것이 익을쯔음 다시와보고 싶네요~~
시댁이 시골이어서 좋은점은 이러한 문화거리를 즐길 수 있다는 겁니다.
어때요, 좋으시지요~~

고택과 너무도 잘 어울리는 석류나무

그리고 감나무..

모과나무가 익어가고 있습니다.
이곳을 돌고 밖으로 나오면 능이 있습니다.

 월성위 김한신(月城尉 金漢藎)의 묘

영의정 김흥경(金興慶)의 아들 월성위 김한신과 화순옹주(和順翁主)의 합장묘(合葬墓)이다. 묘에는 돌담장이 둘러있고, 문인석 1쌍, 망주석 1쌍, 장명등 등의 묘석(墓石)을 구비하였다. 비문에는 영조의 어필(御筆)이 새겨져 있다.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의 묘

1937년에 초배(初配)인 한산이씨 묘에 추사묘와 계배(繼配)인 예안이씨 묘를 이장하여 3위를 합장하였다. 묘에는 석상과 망주석 1쌍이 있고, 묘비는 그 해 9월에 세웠는데, 종인(宗人)김승렬(金承烈)이 짓고 썼다.

김한신과 화순옹주(和順翁主)의 합장묘(合葬墓)를 돌다 전 문화재청장님을 만났습니다.
제 망원렌즈에 들어온 전 문화재 청장님, 그래서 기념사진 한장 남겨 보아요 ~~

화순옹주 정려문(和順翁主 旌閭門)

정려문(旌閭門)은 추사선생의 증조모인 화순옹주(영조의 차녀)의 정절(貞節)을 기리고자 정조가 명정(命旌)한 열녀문(烈女門)이다.화순옹주는 부군 월성위 김한신(1720-1758)이 39세의 젊은 나이로 작고하자, 그때부터 식음을 전폐하고 부왕 영조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부군을 따르고 말았다. 영조는 화순 옹주의 정절을 기리면서도 부왕의 뜻을 저버린데 대한 아쉬움 때문에 열녀정문(烈女旌門)을 내리지 않았으나, 후에 정조가 명정(命旌)하였다. 화순옹주는 조선왕조의 왕실에서 나온 유일한 열녀라고 한다.

이야기는 모두 전 문화재청장님이 이야기 해주시는데요 너무 재미있습니다. 시간을 초과 하리 만큼 재미있게 이야기 하여 주셔서서 자리에서 옮짝 달싹 않하시고 경청하는 분들이 계셨습니다.

http://chungnam.net/mediaMain.do?article_no=MD0000471228&med_action=view&mnu_cd=CNNMENU00014 ☜충남 넷..

화순옹주는 조선왕조의 왕실에서 나온 유일한 열녀문이라고 합니다.
이곳 주변으로 화암사가 있다고 하는데, 화암사는 시간상 둘러보지 보지 못했네요~~

예산의 백송 천연기념물 제106호

백송(白松)은 중국 북부지방이 원산지로, 천연기념무로 지정된 백송은 우리나라에 몇 그루 밖에 없는 희귀한 수종이다. 이 백송은 추사선생이 25세때, 자제군관(子第軍官)자격으로 생부 김노경(金魯敬)을 다라 청나라 연경(지금의 북경)에 다녀오면서 가지고 온 씨를 고조부 김흥경(金興慶)의 묘소 앞에 심은 것이다.
원래 밑에서 부터 세 가지로 갈린 수형이었는데, 두 가지는 고사(枯死)하였고, 현재는 한 가지만 남아있다. 수령(樹齡)은 약 200년이며, 수고(樹高)는 약 10m이다.

주변으로는 여러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어 기념사진 담기 좋고, 살방 살방 둘러 보기 좋은 곳이랍니다. ^^

가족들과 살방거리며 걷기 좋고, 문화재가 있어 공부도 할 수 있는 곳이네요
힘들게 걷는 것이 싫으신 분들은 요런 곳에 오시면 쉬어 가시기 좋을 것 같습니다.
하누리 주말에 시댁 다녀오고 회사다니랴 이거 저거하랴 몸살나서 어제는 블로거 하루 쉬었습니다.
잊지 않으시고 다녀가 주신 이웃님 정말 감사드려요~
태풍이 지나간 흔적은 아픔만 남았네요, 무엇으로 헤아려 드릴까요, 힘내세요 ^^
오늘 하루도 이웃님 행복한 하루 만들어 가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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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희선생고택 (추사고택)

충남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 799-2

TEL: 041-339-7323 

 관람안내

관람시간 하절기 09:00~18:00(3월 ~ 10월)

            동절기 09:00~17:00(11월 ~ 2월)

 구  분

어   

청 소 년 

어 린 이 

 개  인

 500원

300

200

 단  체

 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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