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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내여행/문화재

[창경궁] 결혼할때 야외촬영하고 19년만에 다시 가보는 "창경궁"

 

 

2013/11/05 - [대학로 홍대 아트센터]인생과 헤어에 대한 열정으로 똘똘 뭉친 한국미용 100년 출판 전시회

2013/11/04 - [대학로]2013년 제3회 JW 중외 그림으로 하나 되는 아름다운 동행

조카의 미용 전시회 및 그림으로 하나되는 아름다운 동행이라는 전시회를 보고 나와서 보니 창경궁 이정표가 우측으로 표기되어 있었다. 걸어서 가기 가까우려나 싶어 길따라 걸었다. 거리에 나뒹구는 낙엽이 잡으려면 도망가고 잡으려면 도망가서 쫓아 가다보니 어느새 창경궁이라는 이정표가 눈앞에 펼쳐지는데, "함께 만드는 서울", "함께 누리는 서울"이라는 글씨가 한눈에 들어온다.
어 정말 마음에 드는데 카메라를 들어 올린다. 내눈에 보이는 모든 사물이 이쁘다.

 

 

단풍이 곱게 물든 거리에 한복을 입고 걷는 두 아가씨모습이 이삐보이고,

돌담길 위로 화려한 단풍이 물결친다.

 

 

걷다가 만난 자동차 안테나 커버 낙엽과 함께 인상적이었다.

 

 

 

걷기 좋은 날 관광객이 줄을 잇는다 표2장 사는데 줄을 섰다.
관람료 2인기준 천원 고궁을 설명하는 팜플렛책자 1권당 500원 2권을 구입했다.

 

 

창경궁[昌慶宮]사적 123호

창경궁의 처음 이름은 수강궁(壽康宮)이었다. 1418년 세종대왕(世宗大王)이 왕위에 오른 후 살아 계신 상왕(上王)인 태종(太宗)을 편안히 모시기 위하여 수강궁을 지었다. 그후 세조(世組)의 비(妃) 정희왕후(貞熹王后), 덕종(德宗)의 비(妃) 소혜왕후(昭惠王后),예종(睿宗)의 비(妃) 안순왕후(安順王后)를 모시기 위하여 성종(成宗) 14년(1483) 명정전(明晸殿), 문정전(文王殿), 통명전(通明殿)등을 지어 궁궐의 규모를 넓히고 창경궁(昌慶宮)이라 이름을 고쳤다.

창경궁은 선조(善祖) 25년(1592) 임진왜란 때 불타 버렸던 것을 광해군(光海君) 8년(1616)에 다시 지었다. 순조 30년(1830)에 또 큰 화재가 나서 많은 궁궐 건물이 불타 버렸던 것을 순조 34년(1834)에 대부분 다시 지었으나 정전(正殿)인 명정전(明晸殿)과 명정문, 홍화문은 광해군 8년(1616)에 중건된 이래 원형대로 보존되어 있다. 그 중 명정전은 조선왕궁의 정전 중 가장 오래된 건물로 국보 제 226호로 지정되어 있다.

일제는 순종(純宗) 융희(隆熙) 3년 (1909) 창경궁 안에 동물원과 식물원을 개설하고 일반인에게 관람하게 하였다. 1911년에는 일제가 궁 안엔 박물관을 설치하면서 동 ·식물원을 포함하여 창경원(昌慶苑)이라 이름을 고쳐 그 격을 떨어뜨렸다.

1983년 12월 부터 1986년 8월까지 약 3년간에 걸쳐 창경궁을 왕궁 본래의 모습으로 복구하는 중창공사를 하였다. 창경원으로 격하 시킨 궁의 이름을 창경궁으로 바로 잡고 궁 안에 있던 동물원과 놀이터 시설을 철거하였다. 그리고 문정전(文政殿), 빈양문(賓陽門), 명정전 월랑(明政殿 月廊)등을 다시 지으면서 남아 있던 궁전들을 보수하고 조경공사를 하여 왕궁으로서의 옛모습을 되살렸다.

Changgyeonggung
Historic Site No. 123

Changgyeonggung was first called Suganggung. After ascending the throne in 1418, King Sejong built this palace for his father, former King Taejong, to live. In 1483, the palace was expanded, and Myeongjeongjeon, Munjeongjeon, Tongmyeongjeon, and other buildings were built for Queen Jeonghui, queen of King Sejo, Queen Sohye, queen of Deokjong, and Queen Ansun, Ansun, queen of King Yejong. At that time the palace was renamed Changgyeonggung.

All of the buildings were burned down during the Japanese Invasion in 1592, and the palace was rebuilt in 1616. In 1830 another great fire broke out and many of the place's buildings were destroyed by fire, and these were rebuilt in 1834. The main hall of Myeongjeongjeon, however, was undamaged, and the building that was rebuilt in 1616 is preserved today. It is the oldest main hall of a Joseon era royal palace, and has been designated National Treasure No. 226

In 1909 a public zoo and conservatory were built in Changgyeonggung.

In 1911, the Japanese Empire built a museum in the palace, and the museum, zoo, and conservatory were collectively called Changgyeongwon (Changgyeong Gardens), demoting Changgyeonggung from the status of palace.


From December, 1983 to August, 1986, restoration work was carried out to return in to its original state as a royal palace. The name was changed back to Changgyeonggung, and the zoo and amusement park facilities within the palace were removed. Munjeongjeon, Binyangmun, and the auxiliary buildings around Myeongjeongjeon were rebuilt.(표지판 글을 옮겨 담았어요)

 

 

홍화문 일원 궁궐의 품위를 보여주는 정문

궁궐의 품위를 보여주는 정문을 들어서섰다.
임금과 백성이 만났던 홍화문은 임금이 친히 나가 백성들과 대면하였던 곳이기도 하다. 영조는 1750년 균역법을 시행하기 전에 홍화문에 나가 양반과 평민들을 직접 만나 균역에 대한 의견을 수렴하였다. 이때 대신들은 균역을 반대했지만 백성들이 찬성하자 영조는 백성들의 의견을 따랐다. 정조는 1795년 어머니 혜경궁의 회갑을 기념하여 홍화문 밖에 나가 가난한 백성들에게 쌀을 나누어 주었는데 홍화미 사미도(弘化門 賜米圖)에 기록되어 있다.

 

 

 

 

홍화문을 지나 정면으로 보이는 명정전이 한눈에 들어온다.
창경궁은 조선9대 임금인 성종이1483년(1484년 완공)창덕궁 동쪽에 세운 궁궐이다.
창덕궁과 경계없이 하나의 궁궐로 사용하여 둘을 합쳐 동궐(東闕)이라 칭하였다.

 

 

 

창경궁의 중심부분이 동향이기 때문에 정문인 홍화문(보물 384호)도 동쪽으로 세워졌다.
1616년에 다시 세워진 이 문 앞에서 국왕이 일반 백성들을 친히 만나기도 하고 앞에 있는 왕실 언덕인 함춘원에 활터를 세워 무과 시험을 치르기도 했다. 규모는 3칸 대문이지만 좌우에 한쌍의 십자각을 세월'궐(闕)'이라는 품격높은 대문 형식을 갖추었다. 대문 안쪽에 명당수인 금천을 흐르게 하고, 그위에 옥천교(玉川僑, 보물386호)를 건너는 상징적인 마당을 만들었다. 이 마당을 둘러싼 외행각은 궁궐을 지키는 관원들이 사용했다.

The main gate of Changgyeonggung Palace, Honghwamun, faces east, like the central part of the palace. It was rebuilt in 1616, and it was here that the king received ordinary people. Military examinations were held outside this gate. Hamchunwon Hill, now on the grounds of Seoul National University Hospital, was an archery range. Although the gate was relatively modest for the gate of a royal palace, a pair of Sipjagak pavilions was built on the right and left in order to uphold the standards of a palace gate. Inside the gate, Geumcheon Stream and Okcheongyo Bridge served as a symbolic entry courtyard

 

 

 

옥천교 가기전 홍화문 앞에서 해설가님이 궁궐에 대해 설명해주시는 모습입니다.
주위에서 들리는 새소리를 듣다가 상냥하고 맑은 목소리 마이크를 통해 들려오는 음성이 낯설지 않고 좋았어요
대한민국 국민 중에 궁궐에 대해 알고 느끼고 하는 사람이 몇명이나 될까? 괜시리 궁금한 하루 였다죠
궁궐을 하루 돌아보면서 우리 궁궐을 알아야 역사를 알 수 있다 생각이 듭니다.

 

 

명정문[明政門]은 보물 제385호 이다.

 

 

 

홍화문[弘化門]에서 옥천교[玉川橋]를 지나 명정문[明政門]으로 들어서는 길에서 만난 명정전[明政殿]

명정문[明政門]을 지나 정면으로 보이는 명정전[明政殿]

명정전은 창경궁의 으뜸 전각으로 즉위식, 신하들의 하례, 과거시험, 궁중연회등의 공식적 행사를 치렀던 정전(正殿)이다. 1484년(성종15)에 창건되어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1616년(광해 8년)에 재건되어 현재에 이르나, 현존하는 궁궐의 정전 가운데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규모가 작은 명정전은 왕대비등의 생활공간으로 지은 궁궐이다. 명정전은 단층의 단아한 규모지만 2단으로 쌓은 월대위에 세워져 있어 정전의 위용을 갖추었다. 앞쪽에 펼쳐지 마당, 즉 조정(朝庭)에는 얇고 넓적한 박석을 깔고 중앙에는 삼도(三道)를 두어 왕궁의 격식을 갖추었다.
행각이 조정을 둘러싸고 있고 행각들은 왕실 친위부대의 주둔지나 왕실의 초상을 치르기 위한 재실(齋室)로도 쓰였다.
『명정전은 국보 제226호』로 지정되어 있다.

 

 

 

명정전은 인조가 반정 직후 정전으로 사용하기 전까지는 정사를 위한 공간으로는 거의 활용되지 않았다고 한다. 가끔 과거시험이 열리기도 하고 종종 대내에는 노인들에게 경로잔치를 열었다는 기록도 있으며, 왕실의 연회기록도 남아 있다.
13세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성종에게는 왕실의 웃어른들이 많아서 성종은 세조비인 할머니 정희왕후, 예종의 비인 숙모 안순왕후, 어머니 소혜왕후, 형 월산대군 등 서열이 높은 어르신들을 모시기 위해 생신잔치, 경로잔치 등 각종 잔치를 명전전에서 자주 열었다고 전해진다.
「순조기축진찬도 팔곡병」(1829) 중 '명전전외진찬 부분도'

 

 

 

드므란? 넓적하게 생긴 큰 독이라는 뜻의 순수 우리나라 말입니다. 궁궐에서 주요 건물의 월대와 월대 아래 마당에 드므를 설치하고 그 안에 물을 담아 화마가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놀라서 도망가기를 바라는 마음의 뜻이 담겨 있습니다.

 

 숭문당함인정ㅣ[崇文堂]·[涵仁亭]Sungmundang and Haminjeong
    

숭문당[崇文堂]을 보고 빈양문[賓陽門]을 지나 만나게 된 함인정[涵仁亭]에는 관광객들이 쉬며 담소나누는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앉아 쉼 자체가 한폭의 그림으로 다가왔다.

함인정[涵仁亭]

임금과 신하의 학문적 교류가 이루어진 곳으로 숭문당은 임금이 신하들과 경연을 열어 정사와 학문을 논하던 곳이다. 창경궁 창건 당시에는 없었고 광해군 때 창경궁을 재건하면서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1830년(순조30)소실된 것이 그해 가을에 재건되었다. 경사진 터에 낮은 주초석을 사용하고 앞에는 높은 주초석을 세워 누(樓)처럼 되었다. 영조의 진필 현판이 지금까지 남아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먼발치에서 사진으로만 담아본 숭문당과 함인정의 정교한 정자 모습이며, 남향에다 앞마당이 넓게 트여 있어 왕이 신하들을 만나고 경연을 하는 곳으로 이용하였다. 함인정은 건물 사방이 벽체 없이 시원하게 개방된 모습으로 동궐도에는 지금과 달리 3면이 막혀 있다.

Sungmundang and Haminjeong are buildings behind Myeongjeonjeon, the main hall. Sungmundang was rebuilt in 1830. It was used by the king to hold conferences and discussions with scholars on state affairs and classical literature and to throw banquets to encourage them. The open porch at the front served as the entrance. The building name plaque written by King Yeongjo(1724-1776) remains. Rebuilt in 1833, Haminjeong Pavilion was where the king received government officials who earned the highest scores on state civil and military examinations. Haminjeong means "the whole world is soaked with the benevolence and virtue of the king. "As if symbolizing its name, this pavilion is open in all directions.

  

 

경춘전과 환경전[歡慶殿]

경춘전과 환경전은 통명전, 양화당과 함께 창경궁의 내전을 이루는 침전이다. 이곳을 중심으로 왕과 왕비의 일상생활과 생로병사가 이루어졌던 곳이다. 환경전은 왕이나 세자가 기거했던 것으로 정조는 본인의 탄생을 기념해 경춘전 내부에 [誕生殿]이라고 친히 쓴 현판을 걸기도 했다. 두 건물 모두 창경궁 창건 당시 세워졌다가 임진왜란, 이괄의 난, 순조 연간 대화재 등으로 소실과 재건을 반복하여 지금의 건물은 1834년 순조34년에 재건한 것이다.

 

 

경춘전[景春殿]

경춘전은 성종이 1483년에 인수대비를 위해 지은 대비의 침전이다.그러나 정조와 현종이 이곳에서 탄생하고 대비뿐 아니라 왕비와 세자빈도 많이 사용되었다고 한다.

본다는 즐거움과 걷는 즐거움 속에 사람들 구경까지 렌즈속으로 궁을 둘러 보았다.

 

 

 

 쏭내관의 재미있는 역사 공부현장, 많은 대학생들이 둘러 앉아 쏭내관님에게 역사 공부를 하는 모습입니다.
귀에 쏙쏙 들어 오게 한다는 군요, 재미있는 역사 공부를 하시고 싶으시면 쏭내관의 재미있는 史 교육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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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명전[通明殿]과 양화당[養和堂]

내전 가장 깊숙한 곳에 남향으로 위치한 통명전은 왕비의 침전으로 내전의 으뜸전각이다. 월대 위에 기단을 형성하고 그 위에 건물을 올렸으며, 연회나 의례를 열 수 있는 넓은 마당에는 얇고 넓적한 박석(搏石)을 깔았다. 서쪽마당에는 동그란 샘과 네모난 연못이 있으며, 그 주변에 정교하게 돌난간을 두르고 작은 돌다리를 놓았다. 통명전은 주로 왕비의 침전으로 사용하였지만, 중종과 명종비의 빈전으로 사용된 적도 있고, 정종은 편전으로 사용하였다.

『통명전은 보물 제818호』로 지정되어있다.

자그마한 연못에 동전던지기 하는 외국인과 아이들의 모습을 보았다. 왠지 원안에 동전이 들어가면 환호가 터져 나오는 기분좋은 떨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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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화당[養和堂]

양화당은 내전의 접대 공간으로 사용되었으나, 경종은 편전으로 사용되고 또한 내전의 접대 공간으로 사용되었다. 병자호란 때 인조가 환도하면서 머무르기도 했던것으로 지금의 통명전과 양화당은 1834년에 재건되었다.

 

양화당 주변으로 있는 석탑

 

 

통명전 옆으로 나무 아래 아이가 그려놓은 그림을 보았어요, 어릴적 참 많이도 땅에  도화지 처럼 그림을 그렸던 좋았던 시절이 있는데, 요즘 아이들도 땅위에 그림을 그리나 보네요, 누구를 그렸을까 어릴때는 다 이렇게 그리나봐요~~

 

 

 

통명전을 둘러보고 계단위로 올라가면 내전 터 일원입니다. 이 일대의 숲은 궁궐 여성들의 처소가 모여 있던 생활구역으로 그 가운데 요화당[搖華堂]과 취요헌(聚搖軒)은 효종이 공주들을 위해 지은 건물이었으며, 통화전(通和殿)은 혼전으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그 사이 사이에 궁녀들의 작은 처소들이 많았고 어린왕자들과 관련된 건물들도 섞여 있었으나,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이일대의 모든 내전들이 사라졌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통명전을 옆으로 하고 계단을 올라와 아래를 내려다 보았는데 경치가 멋지게 다가왔어요, 저마다의 눈으로 들여다 보는 창경궁의 아름다움
스마트폰과 DSLR 속으로 차곡 차곡 담아지는 여행기

 

 

사람들 모습이 더 단풍처럼 다가온 시간

 

 

사람들의 여유로운 모습을 보게되고 굴뚝 옆으로 물든 단풍의 화려함입니다.

 

 

 

 

 

 

다음엔 더 여유롭게 와서 통명전 뒤 너럭바위에 앉아 이야기 꽃을 피워 봐야 겠다 싶어요~
어르신 두분이서 대화하는 모습이 좋아 보였습니다.

 

태실과 성종대왕태실비

태실은 왕측의 태반을 기념했던 조형물이며 대실비는 그 사연을 거룩한 비석이다. 내실은 전국의 풍수가 좋은 명당에 흩어져 있어고, 성종의 태실은 경기도 광주에 있었다. 일제는 1928년 즈음에 조선 왕실의 태실 대부분을 서삼릉으로 모으는 과정에서 가장 형태가 온전한 성종태실만 이곳으로 옮겨 연구용으로 삼았다고 한다.

Taesil are shrines of varving sizes where the roval family stored the placenm and umbilical cords of their cluldren. A taesilhi is a stone monument insoribed with a story about the placenta. Taesil are found at auspicjous locanons throughoct the country. The Taesil of King Seongjong was originally built in Gwangin. Gyeonggi-do Province. Around 1928. during the Japanese occupation, the Japanese moved most taesil of the royal family of Joseon to Seosamneung Tomb in Goyang-si, Gyeonggi-do. They moved the Taesil of King Seongjong here for research because it was best preserved of all roval taesil.

한국에서는 태어나자마자 한살이 되는데, 뱃속의 태아도 온전한 존재로 보아 나이를 계산하기 때문에 궁궐에서는 아이가 태어나면 3~7일 사이에 길한 날을 잡아 태아 태반을 깨끗이 씻고 술로 갈무리해 태항아리에 넣었다. 여러 단계를 거쳐 밀봉된 태항아리는 수개월 내에 태실을 선정해 봉안했다. 성종태실이 창경궁에 있는 이유는 일제강점기에 설립된 이왕가 박물관의 진열품으로 사용하기 위해 옮겨왔기 때문이라고 전한다. (가이드북 인용)

 

 

사진 실수를 많이 해서 속상해요, 자꾸 ISO 실수를 하게 되네요ㅡㅡ^

풍기대와 양부일귀

Punggidae & Angbuilgwi

창경궁 풍기대(보물846호)는 대 위에 구멍을 뚫어 깃대를 꽂고 그 깃대에 기를 달아 바람의 방향과 속도를 가늠했던 기상 관측기구이다. 18세기 유물로 추정하며, 탁자 모양의 돌 위에 긴 팔각기둥을 세우고 넝쿨무늬를 정교하게 새겼다. 입체 해시계인 앙부일귀는 17세기 후반에 제작된 제 845호의 모사품이다.

Punggidae is a stone pedestal with a hole at its top into which a pole was inserted with a streamer to indicate the speed and direction of the wind. It is believed to date from the 18th century. The stone pedestal is exquisitely decorated with scroll designs. Angbuilgwi, the concave sundial we see here, is a reproduction of one produced in the latter half of the 17th century, designated as Treasure No. 845.

 

 

 

이 숲 일대는 궁궐 여성들의 처소로 가득했던 생활구역이었다. 궁녀들의 작은 처소들이 많았고, 어린왕자들과 관련된 건물들도 섞여 있었으나 1830년에 일어나 화재와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이일대의 모든 내전들이 사라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This wooded area was formerly a residential area for ladies of the royal family and their maids. Yohwadang and Chwiyoheon were building King Hyojong built for his daughters. Tonghwajeon was used as a conference hall. Between these buildings were many small houses for court ladies, and those with history relating to young princes. A great fire in 1830 destroyed many of these buildings, and the rest were dismantled during the Japanese occupation.

 이 숲에서 들리는 새소리가 무척 이쁘다. 무슨 새 일까? 내 앞에서 모델을 해준 이쁜 새 한마리 담아 왔어요, 아시는 분은 알려 주세요 ^^

 

 

 

많이 걸을 거 같아서 낮은 단화 운동화를 신고 나간날
숲속에서 하트를 만들고 낙엽이랑 쒼나게 놀았어요.
내 인생은 내가 만들어 가는 것 ~!!

 

 

 

 

 하루에 3가지를 한날  옥천교에서 취미가 같은 언니와 기념사진 남겨 봅니다.


 

 

샛노란 단풍이 이뻐서 담으려다가 숲속에서 사랑놀이를 하며 셀카를 하는 남녀 한쌍을 봤죠
그냥 자동 모델이 생겨서 너무 좋았네요~~

 

춘당지는 1909년에 조성된 원지(苑池)이다. 두개의 연못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위의 것이 1.107㎟, 아래 것이 6,483㎟이다. 연못 속의 섬(366㎟)과 1986년에 조성한 것이다.

춘당지는 현재의 큰 연못과 작은 연못 두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고, 아래 쪽의 큰 연못은 원래 내농포(內農圃)라고 부르던, 왕이 직접 농사를 지으며 농정을 살피던 논이었다. 1906년 일본인들이 이곳을 파서 연못을 만들었고 이후 1986년에 한국식 연못으로 재조성한 것이다 춘당지 북쪽에 입접한 작은 연못이 조선시대 춘당지라 부르던 원래의 연못이다.

현재 연못에는 잉어떼들이 줄을 잇는다.

잔잔한 호숫가에 잉어때가 노닐고 작은 연못으로 비추는 반영이 아름다운날 결혼하고 19년만에 다녀간답니다.
야외 촬영을 했던 곳인데, 세월의 흐름속에 다시 와볼 수 있을까 했던 곳들이 겹칠때 마음속으로 일어나는 동요되는 마음

창경궁을 여유로이 걸어보았어요

한주를 마무리 하는 금요일 멋진날 되세요 ^^

 

 

창경궁

서울 종로구 와룡동 2-1

TEL: 02-762-48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