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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내여행/문화재

[전북 순창여행]명종 3년에 순창 점안촌 백방산 자락에 지은 강학당 훈몽재

훈몽재란 訓蒙齋 ?

하서 김인후 선생이 명종 3년(1548년)에 순창 점암촌 백방산 자락에 지은 강학당이다.

최초 하서 선생이 훈몽재를 지은 곳은 대학암 위쪽이었다고 하며, 임진 왜란 때 소실된 훈몽재는 선생의 5대손인 자연당 김시서에 의해 1680년경 원래의 터 인근에

'자연당'이라는 이름으로 복원되었다가 퇴락하였다.

이후 후손과 유림들에 으해 점암촌에 복원되었고, 더불어 하서 선생과 김시서, 송강 정철, 율곡 이이를 모시는 어엄서원이 부근에 건립되었으나, 고종 5년(1867년)홍선대원군의 '서원훼철령'에 의해 철폐되었다. 결국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쇠락해 가던 훈몽재는 1951년 한국전쟁때 소실되었으나, 하서 선생의 학문적 업적과 정신을 되살리고 후세에 전승, 발전 시키며, 나아가 역사적 가치 재조명과 예절, 유학 등 전통문화 교육장으로 활용하고자 순창군에서 현재의 위치에 2009 .11. 9 중건 하였다.

 

훈몽재에 도착을 했는데요, 학생들이 공부하는 모습이 먼발치에서 보였습니다.

마침 점심식사 시간이라 치킨을 먹고 있더라구요, 그래서  인사를 나누고요, 몇학년이냐고 물었더니 대학생이랍니다.

성균관대 한문학과와 여러곳에서 모인 학생들이 요 책을 공부한다고 합니다.

 

 

 

 

 

이곳을 오기위해서 보이는 풍경이랍니다.

 

 

 

 

 

훈몽재를 들어서는 입구에서 바라다 보는 풍경은 한적하고, 건장한 청년들의 웃음소리가 흘러 나왔습니다.

 

 

훈 몽 재

유학을 창도한 곳이었으며, 정치가이자 가사문학의 대가이기도 한 송강 정철(松江 鄭澈)을 비롯하여 조희문(趙希文), 양자징(梁子徵),

기효간(奇孝諫), 반성온(半成溫)등 당대 유명한 학자들을 배출한 해동(海東) 유학의 발전의 산실이었다.

 

 

성균관대 학생을 비롯 여러 곳에서 모인 대학생들이 한문공부를 위해 모였구요, 마침 점심식사를 하고 있어서 이렇게 또 이쁘게 담아올수 있었습니다.

 

 

부모님이 해주던 거만 입던 아이들이 스스로 빨래를 해서 널어 놓은 모습도 볼수 있었구요,

빽빽하게 적힌 한문책에는 하루 느낀점의 읽기도 적힌것을 볼수 있었습니다.

 

 

 

훈몽재 지석묘 /訓蒙齋  支石墓

조선시대의 유현(儒賢)인 하서 선생(河西 先生)이 은거 강학하였던 훈몽재 앞마당 가운데에 있는 이 커다란 돌은 지석묘이다. 지석묘는 고인돌이라고도 부르며, 청도기시대에 정치권력이나 경제력을 가진 족장 등 지배층의 대표적인 무덤양식이었다.

우리나라 지석묘는 남방식, 북방식, 개석식, 위석식 4가지 형태가 있다. 남방식은 땅속에 돌방을 만들고 작은 받침돌 위에 덮개돌을 올린 방식이고, 북방식은 4개의 받침돌 위에 평평한 덮개돌을 올려놓은 방식이다. 그리고, 개석식은 지하 무덤방위에 바로 덮개돌을 올린 방식이고, 위석식은 무덤방이 노출되어 있으면서 판석이 덮개돌 가장자리를 따라 세원진 방식이다.

훈몽재 지석묘는 청동기시대에 만들어지 전형적인 남방식으로 남북방향으로 놓여져 있으며, 길이가 4.9m, 폭이2.43m 높이가 1.4m로 규모가 큰 편이어서 권력을 가진 자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또한 순창군은 지석묘가 산재한 곳이 많아 우리나라 청동기시대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역활을 하는 지역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 곳 훈모재 터는 청동기시대부터 사람들이 모여 살아왔던 곳이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자연당/自然堂

하서 김인후(河西 金麟厚)선생이 당초 건립했던 훈몽재(訓蒙齋)가 세월이 흐르면서 퇴락하였는데, 이를 가슴 아프게 생각한 하서 선생의 5대손인 김시서[金時瑞, 1652-1707년]선생이 원래의 훈몽재를 수축(修築)하고 그 옆에 초당(草堂)을 짓고서 하서 선생의 '자연가(自然歌)'의 듯을 취하여 '자연당'이라 이름하고서 하서 선생의 유업을 계승하였다. 하서 선생이 은거하면서 자신의 자연 귀의 사상을 '자연가'라는 노래를 통해 표현하였는데, 김시서 선생이 '자연당'을 지어 이를 다시 구현 했다고 할 수 있다. 자연당은 하서 선생의 휴손으로 우암 송시열(尤菴 宋詩烈)선생에게 수학(受學)하여 학문과 기절(氣節)이 높아 당시에 소하서(小河西)로 불리었다. 뒤에 '자연당' 도 퇴락하여 사라졌으나, 김시서 선생의 숭고한 뜻을 기리는 의미에서 순창군의 '훈몽재 복원사업'을 통해 운몽재의 부속건물로서 중건되었으며, 다양한 교육프로그램(유학·한문·예절교육)과 학술회의 등이 개최될 교육관으로 활용될 것이다.

이곳은 다양한 교육프로그램및 학술회의 등이 개최딜 교육관으로 활용된다고 하네요..

파아란 하늘과 고풍스러운 한문학교 멋지지요..

 

 훈몽재 훈가재

 

삼연정/三然亭

순창군이 2003년부터 추진한 '훈몽재 복원사업'을 통해 2009년에 현재의 위치에 신축한 훈모재의 정자로서 하서 선생(河西 先生)이 산(山)·수(水)·인(人) [삼자연(三自然)을 노래한 '자연가(自然歌)'에서 그 명칭을 따왔다. 하서 선생은 일찍이 인종(仁宗)의 세장(世子)시절의 사부(師賻)로서 도학(道學)과 왕도(王道)로 보도(輔導)하여 당시 사람들이 모두 뒷날에 당우, 중국의 요.순(堯.舜)임금을 가리킴]의 정치를 기대하였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인종이 갑자기 승하(昇遐)하여 큰 꿈이 무너지자 산수간(山水間)에 은거하면서 부귀 공명을 초월하여 자연과 동화하였다.

이 삼연정은 선생의 자연관을 기리기 위하여 지은 것이다.

공부를 하다가 쉬는 시간에 이렇게 정자에 앉아서 친구와 이야기 꽃을 피우는 모습또한 정겹네요..

 

 

 

 

 

대학암/大學巖

순창군 쌍치면 둔전리 백방산 아래 추령천 변에 위치하여 현재도 30여 명이 앉을 수 있을 정도의 평평하고 넓은 바위이다. 하서 김인후[河西 金麟厚]선생의 문하생이었던 송강 정철 [松江 鄭澈, 1536-1593]의 친필 '대학암(大學巖)' 이 암각되어 있는데, 이 곳에서 하서 선생이 정철에게[대학(大學]을 가르쳤다고 한다. 송강 정철은 소년 시절에 훈몽재에서 공부하였다고 하며, 인근 석보(石洑)마을 앞 돌에 '정철배미(현재는 '천정배미'로 불림)'라고 불리는 논이 있는데, 이는 정철의 공부답(工夫沓)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역사 기록은 여행책자를 인용했습니다.]

 

한문에 대해 관심이 있으시거나, 유학에 과심 있으신분들은 관심있게 봐주시면 좋겠습니다.

조용한 대학당에서 공부를 하는것도 여름을 나는데 좋을것 같습니다.

주변엔 버섯이 자라고 참 경치좋고, 여유로운 모습이었습니다.

비가 많이 내렸는데요 비 피해는 없으신지요? 주말 하누리는 엄마를 뵙고 왔습니다.

한주의 시작일 활기차게 보내시구요, 늘 건강하시길 바랍니다.